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문단 편집) === 피해자 === [[이관술]]이 가장 유명한 피해자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관술신명균.jpg|width=100%]]}}}|| ||독립운동가 이관술의 동덕여고보 교사 시절(중앙에 양복 차림) || 대전형무소 학살 당시 가장 먼저 살해당한 피해자는 독립운동가 [[이관술]]이었다. 이관술은 [[이재유]]와 나란히 [[경성재건그룹]]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경성콤그룹]]의 창건자이자 지도자였던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다. 고문 후유증을 앓는 몸으로 해방의 날까지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하던 투사 중의 투사였다. 따라서 1945년 10월에 중도우익성향 잡지 ‘선구’에서 진행한 최초 여론조사에서 여운형·이승만·김구·박헌영에 이어 5위의 인기를 누렸다. 김일성, 김규식, 김원봉보다 높은 순위였다.[[https://pressian.com/pages/articles/33242#0DKW|그의 죽음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일까?]] 학술적으로 조작된 사건으로 판명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체포령이 내려졌는데도 월북을 거부하고 남한에 남았다가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의 피해자가 된다. 독립운동만 하고 광복 후에는 조선공산당이 합법 정당이었을 때만 활동했으며 아무런 이적행위를 하지 않았고 북한 정권 수립에 전혀 관련 없고 국가보안법을 어긴 적도 없는 무고하고 결백한 사람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반곡초공적비.png|width=100%]]}}}|| ||반곡초등학교 공적비. 이관술이 542평을 기부했다고 적혀 있다. || 이관술은 광복 후에도 반곡초등학교 건물을 신축할 때 542평(1791.74㎡)의 땅을 기부하는 등 한국사회에 기여했다. >이관술은 감격의 해방을 맞았던 대전으로 옮겨져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950년 6·25전쟁이 나자 처형된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좌익사범과 보도연맹 가입자 등 수천여 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기결, 미결, 잔여 형기에 관계없이 모두 처형된다. > >이관술이 남긴 흔적은 많지 않다. 고향의 유품은 일제 경찰이 진즉에 압수하여 파괴하였고, 활동시기엔 위험을 무릅쓰고 <적기> 등의 팸플릿을 만들기도 했으나, 저작자임을 밝히기 어려웠을 것이다. 유일하게 남긴 글은 해방 후 현대일보에 연재한 짧은 회상록인데 그 제목이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이다. 48년의 생애 중 20년을 혹독한 고문과 감옥살이, 밑바닥 생활을 하며 활동하고 도피했던 그에게 조국의 인상은 '감옥'이었는가 보다. 더구나 해방된 조국마저 그를 감옥에 보내 최후를 맞게 하였다. >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안락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갖은 고생을 하던 이관술, 일신을 조국과 조선 민중에 바쳤던 이관술이 캄캄한 산 속에서 죽음을 맞을 당시 나이는 48세다. >---- >박현주,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0362297|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대전형무소 학살 조사로 이관술 학살 당시 상황이 알려지게 되었다. 세로 1m80cm, 가로 50m 구덩이 앞에서 이관술이 마지막으로 "조선민족 만세를 부르겠소"라고 한 뒤 "조선...."까지 외치자 '서서 총' 자세를 취하고 있던 헌병과 경찰들이 일제히 사격했다. 심용현 중위가 이관술의 후두부에 권총을 들이대고 확인 사살했다.[[http://naver.me/x6iGc0rc|[박만순의 기억전쟁] 감옥에서 땅 500평 기부한 독립운동가... 그의 마지막]] >구덩이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린 이관술이 큰 목소리로 “조선 민족 만세”를 외치기 시작하는 순간 심용현의 “사격 개시” 구호가 엇갈렸다. 이관술은 난사된 총탄에 뒤통수를 맞고 바로 쓰려져 구덩이에 몸이 빠졌다. > >이관술은 이미 죽음을 예견하고 담담했으나, 그의 파란만장했던 생은 결국 비운으로 끝을 맺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나서기로 맘을 먹고 민족혁명운동의 맨 앞에서 온갖 고난을 감수하며 해방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해방의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던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고, 채 1년도 되지 않아 일제 경찰 대신 미군정 경찰에 체포돼 감옥에 갇힌 채 보낸 4년. 이관술이 그토록 염원했던 해방된 조국은 온데간데없이 높은 감옥의 담장을 거쳐 마지막으로 산골짜기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차디찬 주검이 된 것이다. 더구나 이 학살은 무척이나 잔혹했으며 야만 그 자체였다. > >“재소자들을 앉혀서 구덩이 쪽을 바라보게 하고, 재소자 뒤통수에 대고 쏘는 거야. 한 10미터 뒤에서 쏘면, 피와 허연 것이 튀어서 바지가 엉망진창이 돼. 나중에는 군복을 새로 갈아입히고, 바짝 들이대라고 해. 총구를 머리에 바짝 들이대면 안 튀어. 그렇게 한 번 쏘고 나서, 꾸무럭거리고 있으면 권총으로 또 쐈어. (중략) 얼마 안 돼서 구덩이에 시신들이 거꾸로 쑤셔 박혀서 다리가 위로 서고, 별거 다 있었어요. 헌병지휘관이 국민방위군(청년방위대)에게 산 위에서 돌을 굴려와서 시신들을 눌러 버리게 했어요.”-과거사위원회 2010년 상반기 보고서 5권 참고인 김○○ 진술 녹취록(2009.2.11) > >골령골에서 벌어진 모든 학살은 그 어떤 것도 적법한 과정을 밟은 것이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미군 사령관의 결정으로 짐작되는 ‘탑 레벨’에서 내려온 명령이 법적 명분의 전부였다. > >이관술이 포함된 7월 3일의 첫 번째 총살이 집행된 후 심용현 중위는 직접 권총을 뽑아 뒤통수에 한 번 더 확인 사살을 했다. >----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2022[[http://m.usjournal.kr/news/newsview.php?ncode=1065600511897357|#]] 독립운동가 [[송언필]]도 대전형무소에서 학살당했다. 송언필은 이관술과 마찬가지로 고문조작 사건인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학살당했다. >제일 먼저 트럭에 실린 이들은 4사(倽)에 구금되어 있던 주요 정치범이었다. 대표적으로는 '조선정판사 사건'으로 서울에서 이감된 이관술과 송언필이 있었다. "이관술 나와." 처형장으로 가는 길이라 짐작한 이관술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의 명령에 응했다. 조선정판사 서무과장이었던 송언필은 이때부터 정신줄을 놓았다. 대전형무소 재소자를 실은 트럭은 흙먼지를 날리며 대덕군(현재의 대전광역시) 산내면 골령골로 향했다. > >이관술이 죽던 날 송언필도 죽었고, 이후 며칠간 진행된 '피의 살육제'에서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대전·충남지역 보도연맹원 1800~3000명이 학살되었다. >---- >박만순, 골령골의 기억전쟁[[http://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513705&SRS_CD=0000011995|#]] 또한 <[[만다라#s-4|만다라]]>, <국수>로 유명한 소설가 [[김성동(소설가)|김성동]]의 아버지 김봉한도 이 때 학살당했다. 박만순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미처 밝히지 못한 사실을 밝혀내기도 한 유명한 활동가이니 학살에 관심이 있으면 저서와 기사를 읽어보는 것도 좋다. 대표적으로 심용현의 범죄를 밝혀냈다. [[이관술]]과 [[김성동(소설가)|김성동]]의 부친 김봉한의 기사를 링크하며, 다른 피해자의 피해내용도 맨 위 링크의 시리즈 기사로 볼 수 있다. * [[http://omn.kr/1puat|박만순의 기억전쟁 - 대전편]] * 이관술 관련 내용: [[http://omn.kr/1rpnm|감옥에서 땅 500평 기부한 독립운동가... 그의 마지막]] * 김성동 소설가의 부친 김봉한 학살 관련 내용: [[http://naver.me/5Wc1crvt|"넌 붉은 씨앗이로구나" 아이에게 평생 상처가 된 한마디, <만다라> 작가 김성동 식구가 겪은 한국전쟁]] * 정상윤 관련 내용: [[https://n.news.naver.com/article/047/0002205539?sid=102|[박만순의 기억전쟁] 정혜열가 이야기① 해방 전에 죽어야 독립유공자가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